낭혜 무염의 사회ㆍ경제적 기반
- 최초 등록일
- 2010.07.17
- 최종 저작일
- 2010.06
- 1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목차
Ⅰ. 머리말
Ⅱ. 낭혜 무염의 사회·경제적 기반
1. 성주사의 개창
2. 왕실과의 관계
3. 지방호족과의 관계
Ⅲ.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9세기의 신라는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진골 귀족체제가 무너져 간 반면 지방세력이 새로 등장하는 시대였다. 불교계도 왕실과 진골 귀족들의 전적인 보호 아래 절정에 도달하였던 교종은 점차 쇠퇴하고, 새로 대두한 선종이 불교계를 이끌게 되었다. 국내에서 수학하다가 당에 유학하여 중간에 선종으로 개종한 승려들이 남종선을 들여왔는데, 이들은 당나라에서 귀국한 이후 지방에 거주하면서 산문을 개창해 그 종지를 펼치고 있었다. 게다가 선승들은 지방뿐만 아니라 중앙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다. 이렇게 9세기 선종계를 주도하였던 인물 가운데 낭혜 무염(800~888)이 있었다.
무염은 무열왕의 8대손인 동시에 달마대사의 10세손으로, 조부 때까지는 진골이었으나 아버지 범청 때에 이르러서는 김헌창의 난에 연루되어 6두품인 득난으로 강등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리고 무염의 어머니의 성이 화씨(華氏)였던 것으로 미루어 외가의 신분이 높은 신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염의 가문은 대대로 명문이었고, 이는 무염의 사회 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무염은 845년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웅천 오합사(烏合寺: 후에 성주사)의 주지를 지내고, 선종 9산문의 성주산문을 개창하여 성주대사로 일컬어졌다.
1970년대 초 신라 하대 선종과 선종산문에 주목하여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한 최병헌은 성주사의 개창에 관해서 김흔의 경제력이 성주사의 개창의 직접적인 기반이 되었다고 단정하였다. 그리고 웅천주 지방에는 이미 김흔과 동일 친족집단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중앙에서 떨어져 나와 토착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인적 기반도 성주사를 개창하는 데 한 몫을 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성주사 개창에는 문성왕을 비롯하여 김양·윤흥 등 왕권과 밀접한 인물들이 관계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무염이 왕실에 대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보았다.
김두진도 성주사의 개창과 관련해서는 김흔의 경제적인 지원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나아가 무염과 김흔이 몰락해가는 무열왕계가 지방호족적인 기반 위에서 중앙 왕실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려는 의도에서 결합하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참고 자료
김두진,「불교의 변화」,『한국사11』, 국사편찬위원회, 1996.
______,『신라하대 선종사상사 연구』, 일조각, 2007.
김수태 외,『성주사와 낭혜』, 서경문화사, 2001.
부경역사연구소, 『10세기 인물열전』, 푸른역사, 2002.
조범환,『신라선종연구』, 일조각, 2001.
______,『나말여초 선종산문 개창연구』, 경인문화사, 2008.
최병헌,「신라하대 선종구산파의 성립 - 최치원의 사산비명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7, 1972.
추만호,「신라하대사상계의 동향」,『한국사4』, 한길사, 1976.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