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남송 시기 이춘년의 건의로 시행된 토지 경계법에 관한 레포트 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李春年의 經界法
1. 경계법의 시행배경
2. 경계법의 제의
3. 경계법의 시행
4. 경계법의 한계점
Ⅲ.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唐 제국의 붕괴로 중국은 절도사가 세력을 가지고 50여 년 동안 5대 10국의 분열시대(907-960)가 계속되면서, 절도사체제가 등장했다. 분열의 시대의 혼란은, 960년 後周의 절도사 출신 조광윤이 宋을 건국하면서 일단락되었다. 宋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황제 독재체제를 구축하여, 할거하고 있던 절도사 세력을 누르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宋은 唐末五代이래 계속되어온 절도사의 횡포를 방지하기 위해, 무인을 대신하여 문관이 국정을 담당하는 ‘문치주의 체제’를 채택하게 되었다. 宋의 문치주의는 군사력의 약화를 가져와 북방의 유목민족의 잦은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宋은 遼와의 연운 16주 영토문제로 대립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宋軍의 허약함으로 굴욕적인 전연의 맹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宋은 새로이 성장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金의 도움을 받아 遼를 멸망시켰으나, 金의 배신행위로 1127년 金의 남침으로 宋은 멸망하고 말았다.
수도 개봉이 함락당하고, 휘종과 흠종 부자 및 황후와 다수 황족들이 金에 사로잡히자, 高宗은 臨安을 도읍지로 하여 南宋정권을 수립하였다. 金의 군사적 위협과 계속된 전란 속에서 高宗은 화북지역을 재탈환하는 것은 고사하고, 南宋의 정권유지에 고심해야 했다. 金과의 和議체결, 국내 통치 질서 회복, 강력한 국방력 구축과, 군 통수권 확립, 국가의 재원확보는 南宋정권이 해결해야 할 최대 과제였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자 나온 것이 李春年이 제시한 ‘경계법’이다. 경계법은 토지소유권과 세원을 파악하고, 농민의 토지에 대한 稅役부담에 균형을 이루기 위해 마련한 법으로, 토지를 측량하고 신고하도록 하여 토지대장을 만들고, 그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서 농민의 세금이나 부역을 결정하여 국가 통제권의 재확립을 모색한 정책이다. 본고에서는 경계법의 시행배경과, 경계법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고, 경계법이 주목받지 못하고 실패한 정책으로 평가되는 한계점도 살펴보도록 하겠다.
참고 자료
유원준, ‘南宋 經界法에 대하여(1)’, 경희사학 20호, 1996
‘南宋 經界法에 대하여(2)’, 경희사학 20호, 1996
고석림, ‘李春年의 土地經界法에 대하여’, 경북사학 제1집, 1979
‘南宋 土地經界法上에 보이는 砧基簿에 대하여’, 대구사학 제15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