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과 안정복
- 최초 등록일
- 2010.06.24
- 최종 저작일
- 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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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과 안정복의 공통점과 차이점 , 충실한 자료수집과 요약에 근거함.
목차
Ⅰ. 서론
Ⅱ. 이익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1. 이익의 생애
1) 가문과 생애
2) 학문 세계 - 저서들을 중심으로
2. 시대적 배경
1) 당시의 학풍
2) 사회경제적 변화
Ⅲ. 이익의 개혁사상
1. 정치적 측면
1) 공정하고 엄격한 법의 집행
2) 존명사대 비판
3) 올바른 인재의 등용
2. 경제적 측면
1) 유농주의
2) 한전법에 의한 토지제도 개선
3) 상업과 돈에 대한 천대
Ⅳ. 성호학파
1. 조선후기 실학
2. 성호학파
ⅴ. 결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이익은 평생을 재야에서 한사(閑士)로서 학문에만 매진한 인물이다. 하지만 당시의 어려운 현실을 분석하고 그 대안으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의 선하를 이룬 인물로 성호학파의 연원을 이루었다. 그리고 백과전서적, 개혁적 성향의 저서들에서 붕당의 폐해와 대책, 과거제의 개혁. 토지제도와 과세 제도의 개혁, 관직의 구조조정을 통한 비용절감, 사치를 조장하는 상업과 돈의 억제 등을 주장하였다. 한편 그의 주장에서 나타나는 사회경제적 개혁사상은 당시 17~18세기 사회경제적 변화의 반증이기도 하다. 또한 성호학파로 이어지는 그의 학문적 경향은 실학의 중요한 중심을 이루었다.
Ⅱ. 이익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1. 이익의 생애
1) 가문과 생애
이익(李瀷, 1681년~1763)의 자는 자신(自新), 호는 성호(星湖)이다.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이하진(李夏鎭)과 권씨(權氏)사이에서 유배지인 평안도 운산 이하진(李夏鎭)은 1680년(숙종 6) 남인 전체가 실권되던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때 진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파직되고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에서 태어났다. 이익이 돌이 되기도 전에 이하진은 운명하였는데 이후 이익 일가는 경기도 광주 첨성리(瞻星里) 당시 광주부(廣州府)의 첨성리(瞻星里)에 살았으나 이곳은 현재 안산시에 속한다. 즉 안산의 첨성리이다. 첨성리는 선조의 묘가 있는 고장으로 당시 부근에 ‘성호’라고 불리던 호수가 있었다. 이 곳은 서해의 연안이어서 ‘성호지빈(星湖之濱)’이라 하기도 하고, 그의 일생을 이 곳에서 학문과 농사로 지냈던 까닭에 “성호지장(星湖之莊)”이라고도 적고 있다.
로 돌아왔다. 본관은 여주(驪州)로 증조 할아버지 상의(尙毅)의 집이 서울 서대문 안 소정동(小貞洞)에 있었기 때문에 정동이씨(貞洞李氏)라고도 불렸다. 여주 이씨 가운데에서도 이 정동이씨에 인물이 가장 많았다.
8세조인 계손(繼孫)에 의해서 집안이 있어났으며, 벼슬은 병조판서에 이르렀고 좌찬성에 추서되었다. 7세조 시계(時啓)의 벼슬은 현감이고, 6세조 공려(公厲)의 벼슬은 공랑(功廊)이다. 3세조 상의의 벼슬은 의정부 좌찬성이었고, 영의정을 추서받았다. 할아버지는 지안(志安)이고,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냈다.
참고 자료
강경원, 『이익 - 인간소외 극복의 실학자』,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1
강세구, 『성호학통연구』, 혜안, 1999
윤사순, 『한국의 성리학과 실학』, 삼인, 1998
이이암, 『한국고전의 발견』, 한길사, 2000
정호훈, 「조선후기 실학의 전개와 개혁론」,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