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한국고대사, 후백제의 고구려역사계승인식, 태봉의 고구려역사계승인식
후삼국의 국가관
목차
머리말
1장. 선국 역사계승인식
1장 1절. 후백제와 태봉의 선국역사계승인식
1장 2절. 후백제와 태봉의 호족
2장. 후백제와 태봉의 선국 역사계승인식
2장 1절. 후백제의 백제계승인식
2장 2절. 태봉의 고구려 계승인식
3장. 후백제 견훤의 백제계승 인식의 근거
3장 1절. 후당과의 관계에서 알 수 있는 백제계승 인식의 근거
3장 2절. 오월과의 관계에서 알 수 있는 백제계승인식의 근거
3장 3절. 일본과의 대외관계에서 알 수 있는 백제계승 인식의 근거
4장. 후백제와 태봉의 반 신라적 성향
4장 1절. 견훤의 반 신라적 성향
4장 2절. 견훤의 일관성 없는 신라에 대한 태도
4장 3절. 궁예의 반 신라적 성향
5장. 후백제와 태봉의 불교
5장 1절. 후백제의 불교정책
5장 2절. 태봉의 불교정책
맺음말
본문내용
국가의 부분들은 정치면, 문화면, 경제면, 사회면 등 여러 모습으로 나뉘어 진다. 때문에 국가적 성격을 정의한다는 것은 결국 그 국가의 모습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그 국가가 존속했었으며, 멸망하게 된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삼국이 치열하게 대립했던 후삼국시대에는 경제, 사회, 문화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그런지 후삼국은 단지 혼란스러웠던, 신라말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단계로만 인식되었다. 그러나 후백제 혹은 태봉이 삼국을 통일했다면 비단 후삼국이 과도기적 시대로만 인식되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도기적 상황에서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잠시 존재했었던 나라로만 치부했던 것이다. 즉 후백제와 태봉의 국가적 성격을 정의하는 의의는 여기에 있겠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후백제와 태봉의 국가적 성격을 정의하는 것은 후백제와 태봉의 모습을 그려줄 것이다. 후삼국 후의 고려는 지속적으로 조선으로 이어졌다. 즉 후백제와 태봉은 마지막 혼란기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후백제와 태봉은 스스로 정립하고자한 국가적 성격도 있었으며, 건국 후에 만들어간 국가적 성격도 있다. 이 둘은 곧 전체적 국가적 모습, 성격이 된다. 본 내용에서는 존재 기간이 짧았던 만큼 후백제와 태봉을 건국을 하면서 각 건국세력들이 그 지역인과 호족들에게 내세웠던, 혹은 건국 후에 더욱 강화하려 했던 선국(先國)의 역사계승인식과 건국 후에 국가가 만들어간 국가적 성격이라 할 수 있는 불교를 통해 후백제와 태봉의 국가적 성격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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