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정치-비시정권
- 최초 등록일
- 2010.06.14
- 최종 저작일
- 2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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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비시정권의 수립부터 해체까지
목차
1. 비시정권의 수립
2. 비시정권의 성격
3. 비시정권의 몰락
4. 비시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 -방패론
5. 결론
본문내용
1. 비시정권의 수립
(1) 제 2차 세계 대전의 발발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은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하고, 소련군이 18일 폴란드의 동쪽 국경을 침공함으로써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그러나 프랑스는 당시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기도 했거니와 전쟁에 깊이 관여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가하려고 하기 보다는 불-영 연합군의 마지노선Ligne Maginot 뒤에 참호를 구축하고 방어태세만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수동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총지휘본부의 우유부단함과 부적절한 전략, 부족한 훈련 등은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석권한 독일군을 제대로 저지하지 못했고 순식간에 파리가 함락되었다. 당시 제 3공화국의 수상이었던 레노Paul Reynaud는 6월 16일,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페탱Philippe Pétain에게 수상직을 물려준다.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군을 물리친 업적으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페탱은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 땅을 떠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독일과의 휴전을 주장, 독일군의 부분적인 점령을 인정하는 휴전협정을 체결한다.
(2) 제 3공화국의 몰락
독일군이 보르도까지 점령하자, 페탱 정부는 독일군의 점령 외 지역이던 자유구역Zone libre 중 비시Vichy를 전시수도로 지정하고 의회의원들을 소집했다. 1940년 7월 10일, 비시 대극장에 모인 649명의 의원들이 투표에 참여하여 압도적인 다수(찬성 569표, 반대 80표)로 페탱이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고 새 헌법을 제정하는데 동의했다. 영국에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한 드골과 처칠 수상의 영국을 제외한 모든 외국 정부들과 프랑스 국민들도 더 이상 공화정이 아닌 프랑스 국Etat français을 인정했다.
2. 비시정권의 성격
(1) 독일과의 관계
프랑스와 독일과의 휴전협정을 보면 비시정권이 사실상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프랑스의 전투재개는 금지되었지만 독일의 무력행위가 중단된 것은 아니었고, 프랑스 포로의 귀환 보류, 병력수 제한, 공군과 함대의 무장해제 등 프랑스에 불평등한 군사조항과 강제노동, 막대한 독일 점령군 유지비를 프랑스 정부가 부담할 것을 규정한 조항 등을 통해, 비시정권의 통치지역으로 분리된 남부 프랑스는 형식적으로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페탱의 명성을 이용한 독일의 실질적인 점령 형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시정권이 독일과 긴밀한 협력을 꾀했던 데에는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자기 보존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항복보다는 휴전협정의 결과가 프랑스에 보다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로저 프라이스,『혁명과 반동의 프랑스사』, 개마고원, 2001
김복래, 『세계각국사 프랑스사』,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5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역사』, 까치, 1998
박원순, 프랑스의 부역자 처벌, http://www.bluecabin.com.ne.kr/split99/france.htm#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