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민족지의 재이해
- 최초 등록일
- 2010.05.31
- 최종 저작일
- 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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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언론의 역사 중 일제 민족지의 재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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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일제하 언론 상황 개관
1910년 통감부는 8월 29일 합방을 공표했다. 통감부 대신 총독부가 들어섰고, 데라우치 통감이 초대 총독을 맡았다. 이른바 `합방`을 전후하여 일본은 민영신문을 모두 폐간했다. 또한 <대한매일신보>를 매수하고 제호를 <매일신보>로 바꾸어 총독부의 기관지로 발행하는 등 언론에 제제를 가했으며 총독부는 친일지 역시 발행을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그 동안 한국침탈의 선전매체로 활용해 온 일인 경영의 신문에도 손을 대 서울에서 발행되던 일인신문을 모두 정리했다. 이른바 합방을 전후하여 이렇듯 신문을 대대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서울에는 3개의 총독부 기관지가 발행되고, 지방에서는 일인 경영의 지방지들과 민족지인 <경남일보>가 살아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경남일보>도 1914년 말에 종간했다.
총독부는 언론정리에만 그치지 않고 모든 단체를 해산했다. 민족진영의 단체는 물론 한일합방을 주장한 일진회 등의 친일단체도 모두 없앴다. 총독부는 결사와 집회를 금지하고 철저한 무단정치를 단행했다. 그러나 가혹한 식민통치는 1919년 3 ․ 1 운동이 터짐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3 ․ 1 운동 이후 일제는 일제대로 군사적 강압통치의 한계를 느끼고 식민지 통치수법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한 나머지 보다 교활한 속임수로 민족 분열을 획책하게 된다. 그들은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간판을 내걸고 지주 ․ 자본가와 지식인 등 식민지 상층부의 정신세계에 숨통을 트게 만들어주는 척하여 호감을 사면서 자기네 품속으로 끌어당기는 한편 당시 민족적 자주독립과 사회적 계급해방 의식에 눈을 뜨고 조직화되기 시작한 근로민중의 적극적 항일운동엔 폭력과 이간질로 더욱 거센 제동을 걸었다. 일제는 3 ․ 1 운동을 전후하여 국내외에서 무장활동이 활발해지고 민중세력을 대변하는 지하신문들이 잇달아 쏟아져 나오자 이에 당황하여 선심이나 쓰듯이 근로민중과 대립세력인 지주 ․ 자본가 세력에게 언론매체인 신문 발행을 허가함으로써 항일 독립운동과 지하언론에 대한 대항언론으로 앞장세우기에 이른다.
이런 변화로 1920년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및 <시사신문>이 나오고 정치문제나 시사문제를 다룰 수 있는 <개벽>과 같은 잡지가 나오게 되었다. 일제의 유화정책은 일종의 기만이었다. 일제는 유화정책의 뒤안에서 통치기구를 더욱 팽팽히 조여맴으로써 문화정치를 지탱했다. 일제는 침략전쟁을 전개하면서 언론 통제를 점차 강화한다. 1931년 만주를 침략하면서 언론 통제를 강화한 총독부는 1937년의 중국본토 침략을 계기로 우리나라 민족지를 모두 어용지로 전락시키고, 1940년에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아예 서울의 민영신문을 모두 폐간하고 말았다.
일제시대의 언론 상황에 대해 전반적으로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지금부터는 1919년 3월 1일 이후 다시 등장한 민영신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대표적인 민영신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사회사상을 정리한 후에, 이들을 다시 평가해보려고 한다.
참고 자료
【참 고 문 헌】
․ Michael E. Robinson, 《일제하 문화적 민족주의》, 김민환 역 나남출판, 1990
․ 김민환, 《한국언론사》, 나남출판, 2006
․ 김민환, 《일제시대 민족지의 사회사상》 언론과 사회, 1994
김민남 외 5명 《새로 쓰는 한국언론사》, 아침, 1993
․ 강동진, 《일본언론계와 조선》, 지식산업사, 1984
․ 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 《조선일보 사람들 - 일제시대편》, 랜덤하우스중앙, 2004
․ 정진석, 《언론조선총독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