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혼
- 최초 등록일
- 2010.05.25
- 최종 저작일
- 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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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서론
▣ 본론
Ⅰ. 고려 건국설화 속의 근친혼
Ⅱ. 고려왕조 안에서의 근친혼
Ⅲ. 고려왕조안에서 근친혼의 성행배경
Ⅳ. 근친혼에 대한 부정정 시각
Ⅴ. 오늘날까지의 근친혼의 변화
▣ 결론
본문내용
서론
근친혼이 가능했던 사회!
지금 근친혼이라고 하면 더러운것, 나쁜 것으로 대부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과거에는 종족번식과 생존을 위해 근친혼이 행해졌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에는 근친혼이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근친혼은 종족번식과 생존말고도 또 다른 측면인 혈족의 순수성과 특권을 위해 행해졌던 때가 있었다. 당시의 이러한 근친혼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이었고 현재까지의 변화는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몇 해 전에 민법의 ‘동성동본불혼’규정이 위헌 판결을 받아서 지난 수백 년간 우리가 당연시해 온 인식이 무너진 적이 있었다. 동성동본 사이에 혼인을 한다는 것은 넓게 보면 근친혼을 포함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 역사에서 ‘동성동본불혼’이 관습법처럼 굳게 자리잡은 것은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16세기 이후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동성사이에 혼인을 하지 목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동성간이나 친척간에 혼인을 하는 형태인 근친혼이 바로 고려의 독특한 사회모습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근친혼은 고려 때에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하였던 혼인형태는 아니다. 과거 종족번식을 위해 근친혼이 성행하였고 신라시대에는 왕족을 구분하는 이름인‘성골’이나‘진골’로 나누기위해서도 근친혼이 이루어 졌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시대에 갑자기 근친혼이 생긴것이 아니라 이미 신라1천년동안 사람들 사이에서는 익숙한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제2대왕인 혜종때 부터 근친혼이 시작되어 이후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고려의 역대 34명의 국왕 가운데 절반이 넘는 27명의 국왕이 종실에서 배우자를 맞이하여 혼인을 하였다. 도대체 왜, 특히 왕실에서, 근친혼이 행해졌을까? 동성사이의 근친혼은 아마도 가문·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혈통의 순수성을 강조하기위해 고려건국설화중 하나인 보육과 덕주의 혼인이야기를 통해 어떤 식으로 폐쇄적인 통혼궐을 형성함으로써 권력집중과 왕족의 특권을 향유 하였는지 알아보고 그 이후 조선시대를 걸치면서 지금까지 근친혼의 변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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