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병사
- 최초 등록일
- 2010.05.09
- 최종 저작일
- 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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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천의병관련지역을 직접 다녀와서 쓴 제천의병사 관련 레폿
목차
* 제천의병사 (堤川義兵史)
1) 위정척사 운동과 전기의병
2) 화서학파와 제천의병
3) 남산전투
4) 지평의병에서 제천의병으로
5) 충주성 장악
6)제천으로 돌아와 전열을 정비
7)일본군의 병참기지 공격
8) 제천 주민의 후원
9) 일제의 의병 탄압
10) 전국의 의병봉기를 이끌어낸 제천의병
11) 제천, 다시 의병천하가 되다.
12) 치열한 유격전의 전개
13) 제천의병의 마지막 모습
14) 해외에 건설되는 항일의 근거지
15)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본문내용
* 제천의병사 (堤川義兵史)
청일전쟁 후 일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개화를 빙자하여 단발까지 강요하였다. 이 때 제천의 장담 마을에 모여 공부하던 선비들은 나라의 운명이 위기에 닥쳤음을 알고 의병항쟁의 길에 나섰다. 제천의병은 을미년 말(1896년 1월)에 봉기하였다. 처음에는 지평(양평)의 포수부대가 중심이었지만, 결국은 유인석을 중심으로 한 장담의 선비들이 의진을 이끌게 되면서 호좌의진(湖左義陣)으로 재출범하게 되었다. 친일적인 지방관료들을 처단하며 한때 충주성까지 장악한 제천의병은 전국의 의병을 선도하고 전기의병(을미의병)의 상징이 되었다. 주변의 여러 고을을 장악하고 가흥과 수안보 등의 일본군 병참을 끊임없이 공격하였으며, 충남과 영남 쪽까지 나아가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그들의 투쟁은 아관파천 후에 내려진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근거지인 제천을 빼앗긴 후에는 양서지방으로 옮기면서까지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결국은 압록강을 넘어서고야 말았다. 망명 후 의병은 일단 해산되었지만, 그 후에는 유인석을 중심으로 해외에 무장 항쟁의 기지를 세우기 위해 노력 했다. 고종이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던 1907년 여름에는 이강년이 다시 봉기했다. 호좌의진(湖左義陣)을 계승한 그는 소백산 일대에서 전개된 일본군경들과의 수많은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고, 한때는 경기도 가평 지역까지 진출하여 서울 입성을 노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강년이 희생된 후로는 김상태 등이 한일합병 이후까지 투쟁을 이어갔다. 이처럼 제천의병은 한말의 대표적 의병부대로서 여러 차례의 전국적인 의병항쟁을 매번 선도하였고, 가장 오랫동안 저항하였으며, 해외에서 전개된 독립전쟁노선의 선구를 이루었다.
13) 제천의병의 마지막 모습
화악산 지구에 주둔하면서 의병항쟁의 진로를 모색하던 이강년 부대는 1908년 봄에 접어들면서 본래의 근거지인 제천 쪽으로 향하였다. 백담사, 홍천, 양양, 인제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렬하게 부딪치면서 내려온 이강년은 그동안 소백산 자락에서 활동해 온 동지들과 만나 대규모의 연합의진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경북 봉화의 서벽, 내성에서 일본군과 크게 싸워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집요한 공세에 따라 의병항쟁의 공간은 좁혀지고 있었다. 결국 이강년은 7월2일 제천의 작성산에서 일본 군경의 기습을 받아 부상을 입고 체포되고 말았다. 오랫동안 항일투쟁을 주도해 온 이강년이 체포되면서 제천 일대에서의 의병활동은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상태 등에 의해 ‘합병’후 까지 의병항쟁은 지속되었다.
14) 해외에 건설되는 항일의 근거지
1896년 여름에 제천의병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한 유인석은 그곳을 장차 우리 민족을 다시 일으키는 근거지로 삼으려 하였다. 그의 이러한 구상은 삼원포를 중심으로 한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큰 영향을 주었다. 두만강
참고 자료
제천의병전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