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다시보기
- 최초 등록일
- 2010.05.06
- 최종 저작일
- 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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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 자료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 인물인 박헌영에 관한 자료입니다.
박헌영이 어떤 인물인지 현재 그를 어떻게 보고있는지에 관한 내용들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목차
Ⅰ. 들어가기 전에...
Ⅱ. 박헌영은 누구인가?
Ⅲ. 사후의 박헌영
Ⅳ. 글을 마치며...
본문내용
남과 북이 대립하며 분단국가를 살아가는 우리는, 역사 교육에 있어서도 현재 적대하고 있는 북한의 사회주의 운동계열인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는 아주 희박하게 이름만 알 정도로 교육을 받았다. 그 인물엔 김일성과 박헌영이 대표적인데, 김일성은 초대 북한의 지도자로서 아주 오랜 시간 북한을 통치한 이유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만 박헌영은 그러지 못하다. 박헌영은 해방 후 한반도의 공산주의에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며, 북한의 건국에도 아주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앞에서 말한 이유로 우리에게 잘 알려있지 않으며, 한국전쟁 후 남로당계 숙청작업으로 인해 북한의 초대 지도자 김일성에게 숙청당한 비련의 주인공이다. 민주주의 국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사상이 다른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박헌영이라는 인물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나 지금 이 보고서를 통해 박헌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1.박헌영의 출생과 삶
박헌영은 20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 5월 충남 예산군 신양면에서 미곡상을 하는 아버지 박현주와 서산출신인 어머니 이학규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3세 때 대흥면에서 보통학교가 생기면서 입학하여 1회 졸업생이 된다. 1915년 그는 대흥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에 합격하였다.
말수 적고 온순한 모범생인 그는 경성고보에 입학한 직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의 영어강좌를 이수하는 등 상당히 학구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가 경성고보를 다닐 때는 세계사적인 격변의 시대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과 1918년 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 그리고 1919년 3월 졸업을 코앞에 앞두었을 때는 조선의 모든 민중들에게 가장 커다란 사건, 3ㆍ1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이 되었죠. 나는 전 인민의 거대한 항거에 참여 했지요” 라고 박헌영은 해방 후 소련영사관의 샤브시나에게 말하였다. 3ㆍ1운동은 비단 박헌영뿐만 아니라 조선민중 전체의 가슴을 뒤흔든 혁명적 사건이었다.
참고 자료
전명혁, <박헌영,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조선의 혁명투사>, 《내일을 여는 역사》15, 2004.
양한모, <남로당의 몰락과 박헌영의 최후>, 《북한》164, 1985.
김세균, <세계사회주의 운동과 박헌영>, 《진보평론》24,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