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의 전쟁 책임과 그 면책
- 최초 등록일
- 2010.04.10
- 최종 저작일
- 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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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과 그 면책에 대하여 도서를 참고하여 쓴 소논문 형식의 글
목차
1. 들어가며
1-1. 일본의 황실
1-2. 히로히토
2.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과 면책
2-1.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
2-2. 히로히토의 면책
3. 나오며
3-1. 히로히토와 전후 일본
3-2. 후기
4. 참고문헌 및 사이트
본문내용
1. 들어가며
1-1. 일본의 황실
일본의 한적한 동네로 여행을 갔던 적이 있었다. 자전거 없이는 생활이 불편한 한적한 시골인 그 곳에서 어느 날 자전거 통행을 하지 못하게 막는 날이 있었다. 천황 부부가 그 곳을 방문한다는 이유였다.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길거리에 나와서 일장기를 흔들며 천황 부부를 환영하였다. 그렇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일본에는 아직도 황실이 존재한다. 일본 방송에서는 왕세자의 딸인 아이코 공주가 유치원을 졸업했다는 것에서부터 영화를 관람했다는 등의 신변잡기가 뉴스로 다루어질 정도로 황실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사랑이 크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의 황실은 아직까지도 존속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점에 당연히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이제까지 배워왔던 짧은 지식으로 생각해보자면, 메이지 유신으로 왕정이 복고되었으며, 그러한 천황 체제 속에서 일본은 만주사변, 중일 전쟁을 일으키고, 진주만을 공습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심지어 연합국에 의하여 패전을 겪었기 때문에 패전 국가로서 일본의 황실은 책임으로 붕괴되어야 마땅했을텐데 여전히 건재하여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이 의아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재위하였던 히로히토(쇼와천황)에 대하여 많은 궁금증이 생기게 되었다.
1-2. 히로히토
일본의 제124대 왕(재위 1926∼1989). 중일전쟁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 등 일본의 팽창주의 역사를 체험하였고, 아라히토가미[現人神]로서의 신격을 부정하는 ‘인간선언’을 발표하여 일본국 헌법제정과 함께 상징적인 국가원수가 되었다.
위는 히로히토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다. 이 글은 히로히토에 대하여 일본의 팽창주의 역사를 체험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천황이라는 직위는 직접 일본의 군국주의를 지도하여 일본의 팽창주의를 실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설명에서는 패전 이후의 ‘인간선언’을 통하여 비로소 상징적인 국가원수가 되었다고 나와 있다. 상징적인 국가원수가 된 것이 패전 이후라면 그 이전의 히로히토의 천황 직위는 일본 제국주의 팽창에 기여를 했다는 것처럼 들린다.
없다.
참고 자료
- 고모리 요이치(송태욱),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뿌리와이파리, 2004년
- 도요시타 나리히코(권혁태), 「히로히토와 맥아더」, 개마고원, 2009년
- 에드워드 베르(유경찬),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1989년
- 이창위,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흥망사」, 궁리, 2005년
<참고사이트>
- 네이버 백과사전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