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신라말 농민항쟁과 후삼국
목차
1. 머리말
2. 농민항쟁의 배경
1) 귀족지배층의 과중한 수취
2) 불교선사의 이념적 영향
3. 농민항쟁의 전개과정
1) 농민층의 도적봉기
2) 농민항쟁으로의 발전
3) 각 지역별 농민항쟁
4. 후삼국의 정립
1) 성주ㆍ장군의 등장
2) 후백제ㆍ태봉의 성립
5.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1. 머리말
신라 중대와 말기의 잇따른 정치적 변란은 전제왕권을 중심축으로 한 중대의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동요를 반영하는 것이었고, 아울러 하대로의 전환은 그로 인한 지배체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대에 이르러 성립된 귀족연립정권은 중대 지배체제가 변화한 결과였다. 중앙권력의 분산은 일원적이고 집권적인 국가권력의 통치력을 약화시키면서 신라사회의 모순을 증대시켰으며, 특히 757년(경덕왕 16년) 녹읍(祿邑)의 부활은 그러한 모순을 더 한층 촉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녹읍은 귀족관리들에게 녹봉으로 지방의 지정된 읍에서 직접 조세를 거둘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제도였다. 이때 대부분의 귀족관리들은 자신의 가신(家臣)들을 시켜 수조(收租)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었다. 녹읍제도 하에서, 녹읍민(民)은 녹읍주(主)에게 조세를 납부하는 동시 국가에 요역을 부담하고 공부(貢賦)를 바치는, 국가와 녹읍주에게 이중지배를 당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때 조세 이외의 녹읍민에 대한 수취는 지방관리들을 통해 실현되었다. 아울러 국가에서는 그들에게 수조권을 벗어난 녹읍주들의 지배행위를 통제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신라 하대에는 귀족관리들의 사적 지배와 지방관리를 통한 공적 지배의 이원적인 지배구조가 촌락사회에 관철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 하대는 군현제를 통한 국가의 지배와 녹읍을 통한 귀족들의 사적인 지배가 촌락사회에 관철되었지만,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하대 정치적 지배구조의 특성과 녹읍의 성격에서 기인하는 자체의 구조적 모순 때문에 후주의 지배만이 강화되는 추세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배구조는 지방사회에서 국가권력의 결제를 받지 않고 언제든지 자의적인 취렴이나 과중한 수탈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도적으로 용인해준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귀결되었던 것이다. 결국 신라하대의 붕괴는 가속화 될 수 밖에 없었으며 후삼국의 분열로 이르게 되었다. 아래에서는 신라 하대의 정치적 ․ 제도적 혼란과 관련하여 농민의 몰락을 조명해보고 더불어 후삼국의 정립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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