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교사 대상 연수를 위한 연구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사건의 전개
1. 제 1차 조선 탐험 (1866년 2월)
2. 제 2차 조선 탐험 (1866년 6월)
3. 제 3차 조선 탐험 (1868년 4월)
Ⅲ. 마무리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머리말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은 1868년 4월 프러시아(독일)의 상인 오페르트 등이 현재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는 신부를 포함하여 문명국이라고 자처하는 나라 중의 3개국 사람들이 관련되었고 그 밖에 다른 2개국 사람 다수가 고용되었다. 프러시아(독일) 국적 상인 오페르트는 자신을 총책으로 하여 미국인으로서 상해 역사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모험가 젠킨스를 자본주로 하고, 프랑스인 선교사 페롱을 통역관 겸 보좌관으로 대동했다. 이외에 조선 사람 천주교 신자 약간 명과 말레이시아인 25명, 100명 내외의 청국인 등을 승무원으로 동승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도굴의 시도 자체는 그 성공이나 실패에 관계없이 국제적 성격을 띰으로써 조선의 정책 결정이나 대외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나아가서는 천주교 탄압, 쇄국 정책, 서양인에 대한 조선 사람의 인식, 사회 변화 등에 미친 영향도 적지 않았다.
이렇듯 단순한 한 서양인의 도굴사건으로 치부되기에는 엄청난 결과를 낳은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연군과 오페르트에 대해 알아보고 그 사건의 과정과 의의를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남연군(?-1822)은 조선 왕족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완산(완산: 현 전주)이며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생부이다. 본명은 구(球)이고 인조(仁祖)의 왕자 인평대군(麟坪大君)의 6세손인 병원(秉源)의 아들이다. 그는 은신군(恩信君)에게 양자로 가서 남연군에 봉해졌고, 1815년 수원관(守園官), 1821년 수능관(守陵官) 등을 지냈다. 남연군은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흥녕군 창응, 차남 흥완군 정응, 삼남 흥인군 최응, 그리고 사남 흥선군 하응이다. 이렇게 5남매를 남기고 남연군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대원군은 불우한 소년기를 보내게 되었다. 당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척족의 횡포가 거세어 대원군은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무능한 왕족임을 자처하며 거리의 부랑자나 장안의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권력에 도전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전국을 방랑하다가 현재 남연군의 묘소가 있는 상가리로 오게 되었다. 이곳에 묘를 쓰면 집권할 수 있다는 어떤 풍수가의 말을 듣고 겉으로는 구걸 행각을 하며 집권에의 웅지를 가슴속 깊이 숨긴 채 대원군은 이곳으로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옮기기로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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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교사모임, 「개항과 전쟁사」. 2003.
김명호,「초기한미관계재조명」, 역사비평사, 2005.
이이화, 「조선의 문을 두드리는 세계 열강」, 한길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