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흥사지,정지사지,공주정지산유적
- 최초 등록일
- 2010.01.23
- 최종 저작일
- 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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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577년에 백제 위덕왕이 자신의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창건하였다. 《삼국사기》에는 600년 봄 정월에 창건하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지 터에서 발견된 사리함 몸통에 한자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爲刹本舍 利李枚葬時 神化爲三` 즉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 창왕(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 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는 것이 밝혀져, 실제 창건 연도가 삼국사기 기록보다 23년 앞선 것으로 확인되었다.
목차
왕흥사지 (王興寺址)
정림사지 (定林寺址)
공주정지산유적(公州艇止山遺蹟)
본문내용
■ 지정번호 사적 제327호
■ 시 대 백제시
■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리 48외
Ⅰ. 개 관
577년에 백제 위덕왕이 자신의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창건하였다. 《삼국사기》에는 600년 봄 정월에 창건하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지 터에서 발견된 사리함 몸통에 한자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爲刹本舍 利李枚葬時 神化爲三` 즉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 창왕(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 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는 것이 밝혀져, 실제 창건 연도가 삼국사기 기록보다 23년 앞선 것으로 확인되었다.
Ⅱ. 가람배치
삼국사기에 660년 11월 5일에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계탄(雞灘, 부여강)을 건너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하였고, 7일에 이겨 700명을 목베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절터는 폐허가 되었다.
Ⅲ. 발굴조사
1934년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 일원에서 왕흥명 기와와 석조불 좌상, 토기조각 등이 발견되면서 처음으로 왕흥사의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었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백제문화권 유적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00년부터 부여 왕흥사지(사적 제427호)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제5차 발굴조사를 마치면서, 2004년 6월 15일 "왕흥사는 탑지와 금당지가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1금당식`이며 이는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 구조인 것으로 확인됐다"라는 내용의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 또, 국립부여박물관은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지터에서, 백제시대 사리 장엄구를 발견하여 같은 해 10월 24일 일반에 공개했다.
2007년도 8차 조사에 이어 추가조사가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Ⅳ. 발굴성과
2007년(제8차) 발굴조사는 2002년(제3차) 조사에서 남동편 일부가 확인되었던 목탑지의 전체적인 규모와 축조방식을 비롯해 동서석축,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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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남석, 『웅진시대의 백제고고학』, 서경, 2002
- 이도학, 『살아있는 백제사』, 휴머니스트, 2003
- 이인숙, 『유물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푸른역사, 2000
- 최광식, 『백제의 신화와 제의』, 주류성, 2006
- 이남석,「백제 문화의 이해」, 서경문화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