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흥선대원군은 19세기 조선의 방향타를 잡은 실권자였다. 당시 조선은 끊임없는 민란과 관리들의 부패, 서구 열강의 압박으로 점차 국운이 쇠퇴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권력을 잡은 대원군은 이후 조선과 대한제국, 한국의 운명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대원군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쇄국정책을 펼치고 조선의 근대화를 방해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당시 조선의 상황과 대원군의 생애, 그의 정책을 살펴본다. 그리고 과연 그가 조선의 근대화를 가로막은 인물인지 그의 정책이 정말 쇄국정책이었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목차
1. 서론
2. 19세기 조선의 상황
3. 흥선대원군의 생애
4. 대원군이 실시한 정책
5. 대원군에 대한 평가
6.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서론
흥선대원군은 19세기 조선의 방향타를 잡은 실권자였다. 당시 조선은 끊임없는 민란과 관리들의 부패, 서구 열강의 압박으로 점차 국운이 쇠퇴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권력을 잡은 대원군은 이후 조선과 대한제국, 한국의 운명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대원군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쇄국정책을 펼치고 조선의 근대화를 방해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당시 조선의 상황과 대원군의 생애, 그의 정책을 살펴본다. 그리고 과연 그가 조선의 근대화를 가로막은 인물인지 그의 정책이 정말 쇄국정책이었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2. 19세기 조선의 상황
19세기 조선은 격동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양반들은 끊임없는 계파 분열과 갈등을 일삼고 있었고 그 폐해로 국정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영조, 정조의 탕평정치가 일정부분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 효과는 당대에 머무른다.
정조 사망과 동시에 탕평책으로 서로 견제하고 있던 정치세력간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몇몇 유력 가문에 권력이 집중되고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그 대표적인 가문으로는 안동김씨, 풍양조씨가 있다. 이들은 혼인을 통한 왕실과의 외척관계를 배경으로 권력, 이권을 독점한다. 국정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극심해진다. 그리고 1811년 흉년을 계기로 전국에서 민란이 빗발치듯 일어난다. 그리고 중국이 1840년, 일본이 1853년에 서양 열강들의 함포 외교에 의해서 강제로 개항을 당하고 조선에도 개국의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한다. 이런 와중에 1852년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고, 왕이 어려서 제대로 국정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조대비(풍양조씨)가 수렴청정하지만 곧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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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백과사전, 검색어 ‘대원군’ http://100.naver.com/100.nhn?docid=45201 검색일 2009.11.26
검색어 ‘고종’ http://100.naver.com/100.nhn?docid=14553 검색일 2009.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