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묘 답사기행문
- 최초 등록일
- 2009.12.11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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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연산군 묘에 답사 후 기행문을 작성했습니다.
직접 답사 후 사진까지 촬영하여 삽입하였기에 현장성은 확실히 보장됩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수업시간에 배운 연산군의 유년시절 어머니의 죽음과 사화까지 불러일으킨 그의 폭정. 지금까지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연산군은 무자비하고 말이 안통하는 광분에 쌓인 폭군으로 많이 그려져왔다. 개인적으로 세종이나 정조 등 업적이 많고, 성군의 이미지로 전해져 오는 위인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연산군처럼 역사 속에서 찬밥신세인 아웃사이더들에게 조금의 연민과 동정, 그리고 나와 비슷한 동질감을 찾기도 한다.
이번 답사의 중심 인물은 연산군. 본래 계획은 연산군이 말년에 자주 생활했던 창덕궁부터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어 가는 여정과 그가 최후에 묻힌 묘까지 답사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적, 물질적, 기타 여건이 여의치가 않아 아쉽게도 그의 유배행로를 답사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연산군묘가 도봉구에 위치하고 있어서 쉽게 가 볼 수 있었다.
조선의 제10대 왕으로서 1494년부터 1506년까지 재위하였다. 휘는 융(㦕), 성종의 척자이며, 어머니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 또는 尹起畎)의 딸로 폐비 윤씨이다. 어려서 모친 폐비 윤씨가 사사되면서 정현왕후의 아들인 것처럼 성장하게 되었다. 흔히 1504년(연산군 10년) 폐비 윤씨의 사사 내막을 임사홍 등이 폭로함에 따라 피바람이 몰아쳤다고 알고 있으나, 연산군은 즉위 이전부터 생모인 폐비윤씨의 비극적인 삶과 자신을 돌본 어머니가 친 어머니는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중종이 태어나기 전인 1483년(성종 14) 세자에 책봉되어, 서거정에게 학문을 배우고 즉위 후 녹도(鹿島)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는 등 국방에 주력하였다. 즉위 초기에는 빈민을 구제하고 《국조보감 國朝寶鑑》 등 여러 서적을 완성시켰으며 사창·상평창·진제창(賑濟倉)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사가독서를 부활하였으며, 또한 《경상우도지도》, 《여지승람 輿地勝覽》을 완성하는 등, 즉위 초에는 다소의 업적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연산군이라면 흥청망청 놀고 먹으며 폭정을 일삼느라 업적은 결단코 없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집권 초기에는 나름 성실한 왕이었던 것 같다.
참고 자료
『중종실록』 1년 9월 2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