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의 화폐
- 최초 등록일
- 2009.11.27
- 최종 저작일
- 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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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 후기 화폐제도의 전개에 대해서
정리했습니다.
목차
1.물품화폐
2.은병
3.쇄은
4.소은병
5.보초
6.은전과 오종포
7.저화와 오종포
8.화폐유통의 중단원인
본문내용
1.물품화폐
물품화폐로 사용된 것은 주로 베(布)와 쌀(米)이었다. 그런데 쌀에 비해 베가 좀 더 운반이 쉽고 가치의 안정성이 높았으므로, 포화(布貨)가 미화(米貨)보다 많이 쓰이게 되었다. 그래서 질이 나쁜 마포(麻布)인 추포(麤布)가 대표적인 물품화폐로써 기능하였다. 추포는 후에 품질이 중간정도 되는 오승포 오종포라고도 함. 1승의 올수는 80가닥이었으며, 오승포 정도면 옷을 지을 수 있었음. 그러나 포를 화폐로 사용하면서 점차 추포(추布)로 변하여, 고려 후기에는 승수와 길이가 줄어들어 5승포 대신에 3, 4승포에서 2승포까지 나타났음.
(五升布)로 대체되었다. 추포와 오승포는 고려시대 전 기간을 통해 백성들에게서 가장 일반적인 화폐로서 역할을 하였다.
2.은병 은 1근의 무게로 포 100여 필의 가치
①1101년(숙종6)에 주조, 유통된 화폐로서 고려국가의 공식 법화(法貨)로 사용되었다. 은병은 은(銀) 1근으로 우리나라의 지형을 본뜬 병의 형태로 주조된 것인데 민간에서는 활구(濶口)라고도 하였다.
②경과
숙종 때의 화폐유통정책이 성과를 거두지 못한 후 동전은 활발히 유통되지 못하였지만 은병은 고단위 화폐여서 고가의 물품을 매매하는 경우에 결제수단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③한계
은병은 현실에서 단위가 1근으로 고정되어 있으므로 모든 교역에서 사용될 수 없었다. 또한 동을 섞어서 합주한 것이므로 실제가치가 은 1근 이하이고, 도주된 은병은 국가에서 가치를 인정한 것보다 실질가치가 더 낮으므로 국가에서 확실하게 통제하지 않는 이상 법정화폐로서의 지위는 위협받을 여지가 많았다. 몰래 구리를 섞어 악질의 은병을 주조 충렬왕 13년 4월에 은과 구리를 합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당시 쇄은을 화폐로 정하고 통용하였는데 은과 구리를 합주하여 만드는 자가 있어서 이를 금지한 것이다. -「고려사」79 식화지2, ‘화폐’
충렬왕 당시 국가에서 은과 동의 합주를 금지하였던 것을 보면, 도주하는 자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는 일이 이미 숙종 때부터 발생하여 은병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악질의 은병이 유통되고 양질의 은병은 축재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더욱이 고려후기에는 은의 유출로 인해 국가 소장 은이 부족해지고 국가경제력이 약해져 은병을 새로 주조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사정으로 은병이 감소하고 쇄은이 출현하였다.
참고 자료
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6』, 국사편찬위원회, 1994
2.박용운, 『고려시대사』, 일지사, 2008.
3.원유한, 「고려시대의 화폐사」,『실학사상연구30』.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