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청일전쟁과 조선, 청, 일본의 관계 변화에 관한 레포트
목차
Ⅰ. 서론
Ⅱ. 청일전쟁 직전의 동북아의 정세
1. 19세기 후반 조선ㆍ청ㆍ일
2. 강화도 조약
3. 임오군란
1) 임오군란의 발생
2) 임오군란의 결과와 제물포조약
4. 갑신정변
1) 갑신정변의 발생
2) 한성조약과 천진조약
5. 동학농민운동
1) 갑오동학농민운동의 발생
2) 청·일 양군의 출병
Ⅲ. 청일전쟁의 경과
1. 개전의 준비
1) 공동철병교섭과 좌절
2) 개전
2. 전쟁의 종결과 시모노세키 강화조약
3. 전쟁의 영향과 이후 조선ㆍ청ㆍ일
Ⅳ. 청일전쟁의 의의
1. 군사적 의의
2. 외교사적 의의
3. 아시아 민족운동의 출발점로서의 의의
4. 제 1차 중일전쟁로서의 의의
Ⅴ.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東北亞의 中心國家 韓ㆍ中ㆍ日은 相互間의 뗄 수 없는 關係 속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나라의 일은 비단 한 나라의 일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波長을 몰고 와 곧 다른 두 나라에도 影響을 끼친다.
우리는 이러한 影響力을 일본 총리의 神社參拜를 통한 反日示威 속에서, 역사교과서 編纂을 둘러싼 歪曲 속에서도 보았다. 한ㆍ중ㆍ일은 東北亞의 기상으로써 相互 牽制하면서도, 함께 힘을 합쳐 동북아의 새 미래를 創出하는 데 큰 役割을 擔當하고 있다. 이러한 三國의 關聯性은 비단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까마득히 먼 삼국시대 이전부터 삼국은 서로 關聯을 맺으며 生活하였고, 지금부터 논하고자 하는 淸日戰爭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약 100년 전, 한ㆍ중ㆍ일은 朝鮮ㆍ淸ㆍ日이라는 이름으로 뗄 수 없는 國際關係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朝鮮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형님처럼 받들어지던 나라 淸은 조선에서의 자신의 地位가 흔들릴 것이라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朝鮮 역시 淸은 언제나 형님과 같은 존재로써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새로운 방해꾼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일본이다.
당시 世界는 帝國主義의 흐름이 각 나라를 支配하고 있었고 西歐 列强들은 相對的으로 약한 아시아에 浸透해 오기 시작하였다. 朝鮮ㆍ淸ㆍ日 모두 피해자였다.
그러나, 일본은 國際情勢를 빠르게 認識, 자체의 改革(明治維新)을 통해 빠르게 성장하였고, 國際情勢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던 조선과 청을 攻略하였다.
어떻게 생각하면, 삼국 중에 가장 큰 피해자는 조선이다. 일본의 目的은 조선이 아닌 大陸이었다. 조선은 그저 강을 건너기 위한 다리쯤이었다. 그렇기에 먼저 조선을 攻擊할 수밖에 없는 狀況이었다. 그들은 西歐 列强과 같은 방법으로 조선에 개방을 요청, 江華島條約을 맺어 조선에서의 利權을 獲得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있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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