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문학사상
- 최초 등록일
- 2009.10.09
- 최종 저작일
-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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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다산 정약용의 문학사상 리포트입니다
그의 생애와 문학사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정약용의 생애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출생과 학문, 제2기는 관직, 제3기는 유배기, 제4기는 해배이다.
다산은 1762년 경기도 광주의 마현리에서 출생하였다. 기호남인의 가계로 부친 정재원과 윤두서의 딸인 모친 해남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조부 윤두서와 친형 정약전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5세 때 서울로 유학하여 남인계학자들과 교류하고 그 학맥을 이어받았다. 성호학파와 교류하면서 성호 이익을 백세의 사표로 모시고 성호학파를 이었다. 이벽에게서 서교에 대한 서적을 소개받고, 권철신에게서 경학세계를 배웠으며, 반계 유형원의 경세관에 영향을 받았다.
다산은 1789년 정조 5년 28세 때 규장각연구원으로 벼슬길에 나가면서 그의 관직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정조의 정치이상을 실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그의 실학사상을 구체화하여 수원화성을 건설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1795년 34세 때 천주교의 정치문제화로 노론의 정치공세가 거세지자, 정약용은 금정도찰방으로 좌천되었다. 이 시기 민을 국가의 중요한 주체로 설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와 정치권력을 규정하는 개혁안―전론(田論), 탕론(湯論), 원정(原政), 원목(原牧), 오학론(五學論), 감사론(監司論) 등―을 내어놓았다. 그러다 1800년 39세 때 체제공의 죽음과 천주교문제의 재부각으로 분수령을 맞이하였다.
1801년 40세 때 정조의 죽음과 천주교도를 박해한 신유사옥으로 남인이 몰락하면서 다산은 정계에서 축출되어 유배를 가기 되었다. 이 때 유배를 가서 18년간 장기(경북 영양)와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고, 집안은 폐족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그는 고난을 창조력으로 전환시켜 수많은 양의 저서를 완성하였다. 그의 대표 저서인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와 시〈애절양(哀切陽)〉, 〈탐진촌요(耽津村謠)〉 등이 그것이다.
참고 자료
김승찬․이헌홍 외 『한국의 문학사상』, 세종출판사(2005)
송재소 『다산시 연구』, 창작과 비평사(1986)
남양주시 다산 정약용(http://dasan.nyj.go.kr/)
다산연구소(http://www.edasa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