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Ⅳ. 양무운동의 내용
1. 양무운동의 중심축 - 이홍장
2. 양무운동의 시기별 주요사업
3. 양무운동 시기의 대외관계
본문내용
1. 양무운동의 중심축 - 이홍장
이홍장(李鴻章, 1823~1901) : 자는 소전(少荃), 호는 의수(儀叟), 안휘성(安徽省) 합비현 출생으로, 1847년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홍장은 본래 청 말기 나라의 혼란 즈음하여 발생한 여러 한족계 민병단을 이끌고 있었다. 이홍장의 군대는 `회군(淮軍)`이라 불렸는데, 태평천국의 난에서 스승인 증국번(曾國藩)과 함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하여 조정에 등용되었다. 증국번은 동치 11년(1872) 양강총독(兩江總督) 재임 중에 죽고, 청 말기의 실질적인 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직예총독(直隸總督) 이홍장이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 군림하였다.
이홍장이 증국번의 뒤를 잇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증국번은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한 제일 공로자였다. 태평천국의 수도 남경(南京)이 함락되었을 때 일부에서 “증국번이 상군을 거느리고 북상하여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것이다.”란 소문이 퍼졌다. 청조에서도 증국번의 막강한 군대를 경계하고 있었으나 증국번은 야망이 없었으며, 태평천국의 난 진압 직후 상군을 해산하고 상군의 우수한 간부를 이홍장에게 양보하였다. 그는 양강총독으로 유임할 것을 희망하고 중앙에 진출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직예총독으로 승진하였으나 2년이 채 못 되어 이홍장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 원나라 시대부터 현대까지, 청아, 2008, p406
청조가 이홍장을 직예총독으로 임명한 것은 매우 큰 의미였다. 직예는 수도인 북경의 배후 지역이자 통치의 중심이기 때문에 직예총독은 지방관 중 가장 높은 자리일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이홍장에게 직예총독의 중임을 맡긴 것은 우선 그가 이끄는 회군의 힘을 빌리겠다는 의미였다. 이홍장은 1862년 증국번의 명으로 안휘성으로 돌아가 회군을 조직하여 태평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회군은 양창(洋槍, 서양 총)을 사용하는 외에 서양포를 사용하여 실력이 상군보다 우세하다는 평을 들었는데, 이러한 회군은 양무운동 시기에 청의 주력군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홍장은 이런 회군의 우두머리이자 외교적인 경험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직예총독으로 이홍장만한 사람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참고 자료
①백양(栢楊), (맨얼굴의) 중국사 5, 김영수 옮김, 도서출판 창해, 2005
②신승하, 중국 근대사, 대명출판사, 2000
③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 원나라 시대부터 현대까지, 청아, 2008
④http://blog.naver.com/pure1123?Redirect=Log&logNo=100011832154
⑤http://blog.naver.com/yzlee1941?Redirect=Log&logNo=80058685460
⑥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
⑦쯔가오, 성사경(뜻을 세웠거든 이루게 하라), 허유영 역, 북폴리오(대한교과서), 2005
⑧윤봉준, 선진 3국 부강기(영 미 일 그들은 어떻게 부강국가가 되었나), 삼성경제연구소, 2008
⑨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
⑩신성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