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역사문화스토리텔링 보고서/제주 4.3의 역사적 의미와 콘텐츠 활용방안
- 최초 등록일
- 2024.08.05
- 최종 저작일
- 202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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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주역사문화스토리텔링 보고서/제주 4.3의 역사적 의미와 콘텐츠 활용방안"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제주 4·3 사건
1) 역사적배경
2) 경과
3) 결과
2. 제주 4·3의 역사적 의미
3. 콘텐츠 활용방안
1) 제주 4.3 다크투어 활용
2) 소설 순이삼촌 콘텐츠 활용
4. 맺은 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역사적 배경
광복 직후 제주사회는 6만여 명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재와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행사가 오후 2시에 끝나자 군중들은 곧바로 가두시위에 나섰습니다. 시위대가 관덕정을 거쳐 서문통으로 빠져나간 뒤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이때 기마경찰이 다친 어린이를 그대로 두고 지나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관덕정 부근에 포진하고 있던 무장경찰은 이에 대응하여 총격을 가했습니다. 이로 인해 구경나온 민간인 6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15세 국민학생과 젖먹이 아이를 가슴에 안은 채 피살된 여인도 있었습니다. 3·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을 전개했고,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이 이어졌습니다. 미군정은 이 총파업이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지만,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 등을 대거 제주로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였습니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되었습니다. 서북청년회는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고,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습니다. 1948년 3월 일선 경찰지서에서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갑니다.
2) 경과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의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습니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습니다.
참고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_제주 4·3사건(濟州四三事件)
조남현 {제주 4.3사건의 쟁점과 진실} (돌담 : 1993)
장두환 {무덤에서 살아나온 4.3‘수형자‘들} (역사비평사 : 2002)
VISIT JEJU 홈페이지 https://www.visitjeju.net/kr/
제주 4·3 평화재단 홈페이지 : https://jeju43peace.or.kr/k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