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답지(1차대전종말~독일통일)
- 최초 등록일
- 2012.12.15
- 최종 저작일
- 2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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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양현대사 시험 정리
목차
※ 1차대전의 종말
1) 독일제국의 붕괴
2) 파리 평화회의와 베르사유 조약
※ 1차대전 후의 유럽
1) 대전 후의 유럽
2) 바이마르 헌법
본문내용
1) 독일제국의 붕괴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해 중립을 지켜오던 미국이 연합국 측에 서서 참전을 하게 되었다. 미국의 참전은 비록 러시아가 볼셰비키혁명으로 연합국 측에서 이탈하였다하더라도 그 손실된 전력을 채우고도 남는 것이었다. 미국은 200만의 군대와 막대한 군수품 등을 전쟁에 지원하였다.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연이은 패배로 인해 패전국이 된다는 두려움에 휩싸였고, 외교적인 방법으로 종전을 선택하였다. 막스 공에 의한 입헌군주제적 신 연립정부가 오스트리아와 함께 휴전을 요청하였는데, 연합국은 루덴도르프와 빌헬름2세의 폐위를 요구하였다.
당시의 독일은 키일 수병의 반란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혁명이 전파되고 있었고,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가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노동자와 병사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새로운 체제와 공화국 체제 사이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하였다. 이 때 프리드리히 에버트가 막스 공을 이어 내각의 수반이 되었고, 샤이데만의 주장을 받아들여 독일은 공화정 국가라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독일 제2제국, 즉 비스마르크 제국은 붕괴되게 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2) 파리 평화회의와 베르사유 조약
독일의 휴전 요청과 연합국의 동의로 인해 프랑스 콩피에뉴에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제국,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터키제국이 붕괴되었고, 어느 국가도 완전한 승리를 얻지 못한 채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만을 남겼다
<중 략>
5. 콜 시대
1982년 헬무트 슈미트가 수상일 당시 독일은 오일쇼크로 인해 국내 제정 악화라는 위기에 봉착했고, 이로 인해 자유당과 사민당의 연정이 붕괴되었다. 헬무트 콜은 슈미트로부터 수상직을 인수받았고, 1983년 총선 이후 콜의 기민연과 자민당의 연정이 수립되었다.
콜은 국제무대에서 서독의 위상을 높이는데 주력하였다. 콜 이전 독일은 그동안 과거사 청산을 끊임없이 진행하였고 70년대 이후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치와 홀로코스터 등의 잘못된 행동을 교육하고 프랑스와 공동 교과서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콜 시대에 들어서 서독은프랑스와 함께 양차대전 희생자에 대한 추모행사를 거행하는 등 우호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였고 미국 레이건의 우주 미사일 기지 건설을 골자로 하는 방어전략인 ‘별들의 전쟁’을 지지하였으며, 대 동독정책의 연속성을 유지하였다.
1980년대 동독은 사회주의 통제 경제체제가 한계치에 도달하고 모순이 극대화되어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국가재정이 파탄났고, 이로 인해 국가 경쟁력이 저하되었다. 그리하여 서독에 의존하는 해외차관을 도입하고 서독으로부터의 국가 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동독경제는 파산의 위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ㆍ페레스트로이카를 외치며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연방국은 스스로의 운명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노선으로 변화하였는데 이로 인해 동유럽 국가에서 자유화 물결이 크게 일어났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