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도시대의 무사도
- 최초 등록일
- 2006.12.17
- 최종 저작일
- 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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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번 리포트에서는 에도시대의 무사, 무사도에 대해 다루어 볼 것이다. 에도시대의 무사라는 커다란 주제를 가지고 어떠한 형식으로 리포트를 쓸 것인가 하고 생각하기 이전에 일본어를 전공함에도 무사, 무사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만화나 영화에서 등장하는, 또는 천황을 위해 자결을 일삼는 일률적으로 이미지화된 무사에 지나지 않음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사의 정신세계를 보다 잘 알고자, 그것을 통해 에도시대 무사도의 형성배경을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본 리포트는 시작하는데 예를 들어 그들의 삶의 목표는 무엇이고, 무가사회의 관행(예를 들어 할복자살, 복수 등)은 어떠한 역사과정속에서 형성되었는지에 관한 것들이다.
목차
■ 머리말
■ 본 론
① 에도시대 무사의 사회
②무사의 경제생활
③에도시대 무사의 특권
1. 묘지의 특권
2. 다이토의 특권
3. 기리스테고멘의 특권
④ 무사의 관행
㉠복수
㉡자결
㉢도검
⑤ 무사도
■ 맺음말
본문내용
① 에도시대 무사의 사회상
일본 중세의 무사는 조선시대 양반과 같이 주로 농촌에 토착하면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농업생산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다 주군이 동원령을 내리면 즉시 집결하여 전투에 임하였다. 이러한 무사의 일상은 전국시대 들어와 변화하였다. 막부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한 전국다이묘의 목표는 전국적으로 통일하는 것 이였고 이야말로 전국시대는 전쟁의 시대라고 말 할 수 있다. 다이묘들은 성 주변에 무사들을 결집시켰다. 순수한 소비집단인 무사들이 모여 살게 되자 자연스레 상공인들의 역할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주변의 도시를 조카마치라고 한다. 이는 무사가 농촌에서 조카마치로 이동하면서 병농분리(兵農分離)가 이뤄졌다. 이는 곧 農商分離의 과정이기도 했다. 이는 도요토미 정권시대 적극적으로 추진된 겐치(檢地)와 가타나가리(刀狩)에 의해 완결되었다. 겐치는 경작자를 파악하는 정책이였고, 가타나가리는 서민이 소지하고 있던 무기를 몰수하는 정책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기 일반을 몰수하는 정책이였다. 이 정책의 시행으로 무기는 원칙적으로 무사신분에 의하여 독점화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무기의 몰수가 성공적이였던 것은 아니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농민의 무장해제, 그 결과 도검이 무사의 신분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리고 겐치 등 일련의 병농분리 정책이 일관되게 추진되면서 무사, 농민, 상공인의 거주지도 명확히 구분되었다. 에도시대의 무사는 서민과 신분적으로 상당한 거리가 생긴다.
참고 자료
3일만에 읽는 일본사 타케미쓰 마코도 서울문화사
하룻밤에 읽는 일본사 카와아 아츠시 중앙M&B
일본무사도 구태훈 태학사
사무라이 무사도를 통해 본 일본 정신의 뿌리와 그 정체성 니토베이나조 생각의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