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외교정책의 변화
- 최초 등록일
- 2006.10.24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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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계적 강대국의 내정변화는 이처럼 세계질서를 흔들었고, 특히 그 주변국가들은 피할 수 없는 영향을 받거나, 때로는 그 강대국 정치변화의 소용돌이에 같이 파묻혀서 격변을 겪기도 한다. 한국도 그 예외가 아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국가였으나 러시아 혁명은 독립운동을 하는 한국 지식인에게 전달되었으며, 한국 독립운동의 한 지류를 형성하게 하였다. 1945년 한국이 해방된 이후에도 공산주의는 한반도에서 하나의 강력한 정치이데올로기로서, 한반도의 분단, 한국전쟁, 한국사회의 갈등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소련의 붕괴가 한반도에서 냉전의 유산을 제거시키지 못했지만, 한국은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경제협력을 증진시키고 있으며, 나아가 한반도에서 전쟁예방과 남북한 간의 긴장완화 문제를 협의하고 있다.
목차
I. 서론
II. 본론
가)소련 안보개념과 정책의 변천과정
1)공산주의체제 정착기 (1917~1953)
2)강대국으로서 등장기 (1953 ~ 1985)
3) 공산주의 체제 붕괴기 (1985~1991)
나) 안보정책 변화의 원인과 배경
1)국내적 요인
2)대외적 요인
III. 결론
본문내용
1) 공산주의체제 정착기 (1917~1953)
볼셰비키들이 10월 혁명을 일으켰을 때 그들은 안보문제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볼셰비키 정권의 존립과 혁명목표의 달성은 러시아 혁명과 같은 혁명이 인접국가와 다른 지역의 국가에서 성공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렇게 되면 국가주권이란 의미를 잃게 되고 계급적 연대성이 민족적 차이를 극복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국가안보를 러시아 영역을 벗어난 지역의 상황에 따르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볼셰비키들의 기대와 다르게 전개되었다. 소련식의 혁명은 불과 몇 개의 나라에서만 시도되었고 성공하지도 못했다. 볼셰비키들의 혁명이 유일한 경우가 되어버렸다. 소련은 곧 전형적인 전통국가들의 안보문제를 자신도 갖고 있음을 깨달았고, 자신의 영토와 새로운 체제에 대한 위협과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희망이 있어야 그들의 공산주의 체제가 보존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소련에서는 국가안보와 공산주의 체제안보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레닌(Lenin)의 생존시절에 이러한 안보개념의 재정의는 그렇게 쉽게 정착되지 않았다. 레닌의 주장을 반대하는 자들은 국내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취해진 신경제계획(NEP)은 물론 소련에 대한 적대적 동맹의 형성을 막기 위하여 취해진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비난했다. 그들은 다른 나라의 혁명을 지원하는 정책과 트로츠키(Trotsky)가 주장하는 영구혁명론을 지지했다.
스탈린(Stalin)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후에 소련에는 혁명적 방법으로 안보를 확보하려는 개념과 서구의 근대국가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는 전통적인 안보개념 두 가지가 소련의 지도자들을 지배했다. 스탈린은 최초로 현대적 전체주의 국가를 세우면서 민족국가 경계선을 넘어서 통일전선전술을 구사하였다. 처음에..
참고 자료
<참고문헌>
이무열, “러시아사 100장면(키예프 러시아에서 소련 붕괴까지)”(가람기획)
드미트리 안토노비치 볼코고노프, “크렘린의 수령들(레닌에서 고르바초프까지)”(한송)
한국슬라브학회,”소련과 러시아(사회주의 체제붕괴와 러시아의 재조명)” (나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