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在獄詠蟬-나르시시즘, 매미의 눈에 비친 나를 보다
- 최초 등록일
- 2006.04.21
- 최종 저작일
- 2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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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在獄詠蟬>를 읽고 나르시시즘 관점에서 비판한 글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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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아무리 좋은 칭찬이라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으면 지겨워진다는 옛말이 있다. 그런데 하물며 험담은 오죽하겠는가? 만약에 자기 욕을 하는 데도 계속해서 참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마음씨가 비단결 같아서일까 아니면 바보 같아서일까? 낙빈왕과 측천무후 사이에 벌어진 공방전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측천무후 또한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기에 다시 듣게 된 욕은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태종에게 몸을 바쳤고, 옷을 갈아입고 여승이 된 적도 있다. 그러나 만년에는 춘궁을 어지럽혔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하며, “군자들이 암사슴에게 모해를 당했다”고 공격하는 낙빈왕을 도리어 천재적인 재주를 지녔다며 칭찬한 일도 측천무후의 불같은 성격에 비하면 얼마나 천만다행이었던 일인지 그는 생각을 했어야만 했다. 결국 모함에 걸려들어 옥에 갇히게 된 그는 그제야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며 신세를 한탄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한 번 눈 밖에 난 사람이 다시 눈에 들기란 여간 어렵지 않으니 말이다.
시의 백미는 아무래도 자신의 시련을 자연물에 빗대어 대구 형식으로 드러낸 5, 6번째 구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의 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시어는 바로 蟬과 高潔일 것이다. 옥에 갇힌 시인이 유일하게 바깥세상과 닿을 수 있는 통로는 바로 창이었고 창살 사이로 보이는 나무 한 그루에 붙은 매미가 그의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 것을? 이별한 사람이 슬픈 노래를 들으면 죄다 자기 얘기인 것 같더라는 얘기처럼, 낙빈왕의 억울한 눈에 비친 매미는 고결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더라는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매미는 자유롭게 남은 인생을 노래하는데 반해 자신은 답답한 옥중에서 신세를 한탄한다는 것이겠다. 하지만 곧 다가올 운명이 죽음이라는 우울한 기운임은 매미고, 낙빈왕이고 떨쳐낼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랬기에 더욱 화자는 매미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일체화시키려 했던 것은 아닐까?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화자가 매미를 바라보며 신세를 한탄하지만, 한탄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매미를 통해 나르시시즘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즉, 매미를 바라보는 것 같지만 결국은 매미의 눈을 통해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보고 있다는 얘기이다. 마치 나르키소스가 강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봤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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