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율곡 이이
- 최초 등록일
- 2005.11.18
- 최종 저작일
- 199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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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가 중학교때 독후감으로 써놓은 율곡 이이에 관한 내용입니다,
분량은 얼마 안되지만은, 많은 참고 하시길 바래요^^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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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의 대표적 학자이자 율곡 이이 선생은 덕수 이씨로,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일곱 남매 중 셋째 아들로, 중종 31년(1536년)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신사임당은 율곡 선생의 태몽으로 용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이에 얽힌 이야기가 강원도 평창의 판관대와 봉산서재에 전해지며, 어렸을 적 이름도 현룡이라 하였고 선생이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 불렀다 한다.
선생은 어린 시절을 외가가 있는 강릉에서 보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하여 3세에 글을 읽었고, 8세 때 화석정시, 10세 때 경포대부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해 13세 때 진사초시에 합격했다. 선생이 16세였던 1551년 모친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도를 공부했으나 1년만에 하산하고, 글공부에 전념했다. 22세(1557년)에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결혼해 첫 부인을 얻었다. 1561년 부친상을 당하고, 1564년 7월 생원시에 장원한 후 아홉번의 과거에 장원급제해 구도장원공이라 불렸다. 1564년 호조좌랑이 된 것을 시작으로 예조좌랑, 사간원정언, 이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사간원 대사간, 황해도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대제학, 호조, 병조, 형조, 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율곡 선생의 학문은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중시하는 실천적 학문으로 조선 유학계에 영남학파의 거두인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며 기호학파를 형성 주도하여 조선시대 성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율곡의 이런 학문 경향은 정치 경제 교육 국방 등에 걸쳐 구체적인 개선책을 제시하여 경세가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선조 17년(1584년) 음력 1월 16일 48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법원읍 자운산 기슭, 현재의 자운서원에 묻혔다.
율곡 이이의 저서로는 학교모범,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 등과 이를 집대성한 율곡전서가 있으며,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해주 석담의 소현서원,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인조 2년(1624년) 문성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숙종 7년(1681년) 문묘에 배향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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