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재일교포]우토로 마을
- 최초 등록일
- 2005.05.18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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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강제징용된 재일한국인 마을 우토로에 대한 자료입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우토로에 대하여
1. 마을의 형성
2. 토지문제의 경위
3. 우토로 연표
4. 유엔의 권고
5. 재일 한국인의 역사
Ⅲ. 우토로가 바라는 점
1. 우토로의 호소
2. 주민의 목소리
Ⅳ. 우토로마을 대책현황
1. UN·국제시민단체들, 한 목소리로 우려 표명
2. 우토로 재일조선인의 권리 찾기를 위한 국제 연대성명
3. 국회의원들의 우토로 현지답사
Ⅴ. 결론
-이젠 조국의 힘을 빌릴 때가 되었다
<참고문헌>
본문내용
Ⅱ. 우토로에 대하여
1. 마을의 형성
교토부 우지시 우토로 51번지, 이 곳이 재일조선인 부락으로 형성된 것은 1941년 제2차세계대전 중 교토 군비행장 건설을 위해 일본 정부에 의해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가 한바(노동자가 집단으로 합숙하던 가건물)를 만들어 생활하면서부터입니다. 6000평(21,000평방미터) 가량의 면적에 1300여명의 조선인이 살았던 우토로는 처음에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일제의 식민인 조선인들이 조국을 떠나 우토로에 들어오게 된 경위는 다양합니다. 강제징용으로 일본으로 끌려왔다가 우토로로 흘러 들어온 사람, 일본군 징용을 피할 수 있다고 해서 노무를 선택한 사람, 큰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거짓 선전으로 이주해 온 사람 등. 요컨대 총칼 앞에서 강제 징용 당하거나, 논밭을 빼앗기는 등 생계수단을 빼앗겨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도일해온 사람들입니다.
1945년 일본이 패배하자 비행장 건설은 중단되었고 이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하였습니다. 많은 조선인들이 해방의 기쁨을 안고 자비로 일본을 빠져나갔지만, 조국에 친척도 집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던 사람들, 배 삯을 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 남았습니다. 여건이 허락하는 때에 곧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일본 정부와 기업은 전후보상은커녕 최소한의 인도적인 배려도 없이 이들을 방치했습니다.
조선인들은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가는 날을 손꼽으며 자신들의 역사와 글을 잊지 않기 위해 마을 한 가운데 조그마한 학교를 짓기도 하였습니다. 민족학교는 일본 정부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1949년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일본 사회의 극심한 차별 속에서 조선인이 취업을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제대로 교육을 받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폐품회수업이나 공사판에서 일하면서 연명하였습니다.
참고 자료
-인터넷 사이트
우토로 국제대책회의
http://www.utoro.net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smallnews/9417832
http://blog.naver.com/ppan1/100012398181
-신문기사
‘우토로땅, 한국정부에 팔겠다’ : 한겨레 [사회, 세계] 2005.05.15 (일) 오후 9:33
지금 ‘우토로 마을’ 엔 피눈물이 흐른다 : 경향신문 [사회] 2005.05.13 (금) 오후 6:36
[이주의공간] 우토로 조선인의 눈물 : 한겨레21 [생활/문화, 매거진] 2005.05.06 (금) 오후 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