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세사] 고려말 과전법의 시행
- 최초 등록일
- 2005.04.26
- 최종 저작일
- 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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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고려말 구조적 모순
2. 모순의 개혁
3. 고려와 조선의 녹봉비교
Ⅲ.결론
본문내용
고려 말의 상황을 보면 나라 밖으로 고려는 약 100년 동안 원나라(몽골)의 지배를 받아오고 있었는데 그 원나라 왕실이나 높은 관리들의 집안과 결혼을 하여 권력을 잡은 친원 세력들이 왕까지 좌지우지 하고 있었다. 그들은 원나라 말을 쓰며 원나라의 옷과 머리를 하고 원나라의 음식을 먹었다. 어린 시절을 원나라에서 보내고 원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해야 했던 왕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고, 해마다 많은 양의 공물은 물론 처녀까지 바쳐야 했던 백성들 또한 큰 고통을 당해야 했다. 게다가 이 친원 세력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함부로 남의 땅까지 빼앗아 농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라에 세금을 내야 할 농민들을 자신의 노비로 삼아 자기 농장에서 일하도록 하였다. 그러니 자연히 나라의 살림은 어려워졌고 정치는 점점 부패했으니 민중의 삶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나라 안으로도 간악한 도당들이 남의 토지를 겸병함이 매우 심하였고, 그 규모가 한 주(州)보다 크기도 하고, 군(郡) 전체를 포함해 산천으로 경계를 삼았다. 남의 땅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라고 우기면서 주인을 내쫓고, 한 땅의 주인이 대여섯 명이 넘기도 하며, 전호들은 세금으로 소출의 팔,구할을 내야 했었다. 게다가 공납과 부역까지 국가에 바쳐야 하니 민중들은 삶 자체가 고달픈 업(業)이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노비가 돼 국가에 대한 공납과 부역을 피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긴 농민들은 권문세족의 농장에 투탁(投託)해 스스로 자유민임을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신흥사대부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이전 고려의 개혁주체 세력은 국왕이었다. 고려의 왕들은 스스로 개혁의 주체가 돼 개혁대상과의 투쟁에 나섰다. 당시 개혁대상, 즉 고려의 정치․경제적 특권을 한 손에 쥐었던 권문세족의 수는 불과 60~70여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고려의 왕들은 매우 힘겨운 투쟁을 벌여야 했다. 이는 개혁대상이 소수이긴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유무형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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