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농민
- 최초 등록일
- 2014.01.13
- 최종 저작일
- 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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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 머리말
Ⅱ. 본론
1. 조선의 농업경영방식
2. 조선의 수취제도
3. 조선 농민의 민란
4. 조선 농민(양인농민)의 특징
Ⅲ. 결론
- 맺음말
본문내용
Ⅰ. 서론
-머리말 : 신분규범으로서의 양인과 신분제도상에 있어서의 그의 위치
양인(또는 양민)이라는 말은 법제적인 술어였다. 다시 말하면 해당시대에 있어서 양인이라는 말은 이 신분을 법률적으로 따져서 표현할 때에나 혹은 법률적으로는 아니라도 엄격하게 따져서 표현하려는 경우에는 곧잘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보통 경우에는 여러 가지로 조금씩 뉘앙스를 달리하면서 다른 말들로서도 표현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논쟁할 여지도 없이 양천의 구별이 확연히 지어져 있었으나 양인은 사회적으로 보통 말할 때는 물론이요, 국자적인 공식적 문헌들에서까지 평민·서민·상민이라고도 많이 불렸던 것은 전기한 바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통념상의신분에 대한 용례와 법제적 규범과의 차이에서 우리는 양인이라는 규범을 중국으로부터 빌어다가 쓰게 된 시기와 그 시기가 우리나라 봉건제도 발전에서, 즉 봉건적 신분제도의 발전에서 가지는 일정한 역사적 의의를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 봉건제도의 형성 및 발전의 시기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의 6세기 중엽인 진흥왕대, 8세기의 통일신라 시대, 10,11세기의 고려 초엽, 15세기의 조선조 초는 우리나라 봉건제도 형성·발전에서도 중요한 시기들이었다는 것은 다른 역사적 제 사변을 가지고도 대체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5세기의 조선조 초기는 봉건적 신분제도, 따라서 소위 양천의 법이 일단 확립을 볼 수 있었던 시기임은 재론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양인신분층에 속하는 농민들에 대한 봉건국가의 예속·지배 관계의 확립에 대하여는 이 시기의 부병들의 신분에 의한 편성방법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양인들은 다시 여러 층으로 엄밀히 세분되게 되었으며 이에 ‘적합’하게 봉건국가로부터 소위 병역이 지워졌고, 이 소위 병역은 이러한 신분제도 유지의 주요한 담보로도 되었던 것이다.
15세기 조선조 초의 봉건국가가 노비제도의 확립, 양인신분의 확정에 경주한 것과 비슷한 노력을 하였다.
봉건신분으로서의 양인들은 조선조시대에 있어서도 과거를 볼 수 있었으며, 양반으로 될 수도 있는 신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기한 바 1894년 「군국기무처진의안」에서는 양인의 의복제도가 ‘사(士)’와 마찬가지고 검은 갓에 두루마기를 입고 실띠를 띨 수도 있다고 하였다. 이는 그 이전에 있어서도 ‘서인’ ‘평민’이라고 불리던 양인들의 의복제도가 벼슬 못하는 양반들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도 좋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참고 자료
김석형, 『조선봉건시대 농민의 계급구성』, 북한 과학원출판사, 1957,
이영화, 『조선시대 조선사람들』, 가람기획, 1998,